의료기관의 혁신은 새로운 기술을 도입한다고 완성되지 않는다. 필요한 인력을 확보하고, 구성원의 역량을 키우며, 기존의 업무 방식을 바꾸는 과정이 뒤따라야 한다. 변화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만큼이나 이를 현장에 정착시키는 일이 중요하다.
10월 20일 코엑스마곡에서 열린 제49차 IHF 세계병원대회 ‘변화를 이끄는 리더십: 미래의 인력과 조직 구축’ 세션에서 국제 보건의료 리더들은 두바이, 스페인, 콜롬비아, 싱가포르, 한국, 핀란드의 의료기관들이 추진한 의료 혁신 사례를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집트 Mohamed Hablas 디렉터(Saudi German Health Egypt & North Africa)가 좌장을 맡은 이번 세션에서 발표자들은 의료 인력 부족과 리더십 역량 개발, 진단검사실 운영 개선, AI 기반 전환, 전공의 교육 개혁, 신규 병원 개원에 따른 조직 변화 등 각기 다른 과제를 중심으로 의료 혁신을 언급해 눈길을 끌었다.
각각의 사례는 달랐지만 제한된 자원으로 의료의 질을 유지하면서 어떻게 조직을 바꾸고, 그 변화를 지속할 것인가라는 고민은 동일한 셈
두바이, 해외 인력 의존에서 자국 내 양성으로 전환
Khawla Alhajaj 박사(두바이 보건청 의료 교육 및 연구 담당 국장)는 의료 인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국 내 교육 역량을 키우는 데 주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전 세계 보건의료 인력 부족 규모를 1,11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의료 인력을 확보하려는 국가 간 경쟁이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해외 인력 채용에만 의존하는 방식으로는 장기적인 수급 안정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 Alhajaj 박사의 설명이다.
아랍에미리트(UAE) 역시 해외에서 교육받은 의사의 비중이 높다. 발표에 따르면 UAE 의사의 약 82%가 해외에서 교육받았다. 두바이 보건청은 이러한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먼저 의료 인력 수요와 공급의 격차를 파악하고, 부족한 전문 분야를 중심으로 교육 계획을 수립했다.
전공의와 전임의 수련 정원을 늘리는 한편, 에미리트 국민이 의학과 간호학 등 보건의료 분야로 진출할 수 있도록 공공·민간 부문의 장학 프로그램도 확대했다. 교육을 마친 인재들이 수련과 전문성 개발을 거쳐 의료 현장에 진입할 수 있도록 경력 경로를 마련하는 데도 힘을 쏟았다.
특히 민간 의료기관의 참여를 끌어낸 점이 눈에 띈다. 정부 부문만으로는 늘어나는 교육 수요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민간 병원에도 교육기관으로서 역할을 부여하고, 인센티브와 인증 체계를 통해 참여를 유도했다.
그 결과는 성과로 나타났다. 발표에 따르면 2019년 이후 교육에 참여하는 의사의 비율은 3%에서 20%로 높아졌다. 공공·민간 교육병원 수는 160%, 전공의 수련 정원은 220%, 전임의 프로그램은 260%가 증가했다.
Alhajaj 박사는 인력 양성의 핵심은 단순히 교육 정원을 늘리는 데 있지 않다고 강조했다. 의료 수요를 정확히 예측하고, 교육기관과 교수진을 확보하며, 교육의 질을 유지할 수 있는 체계를 함께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스페인, 리더십 평가를 조직의 성장 기회로
Natalia Allué 박사(Fundacio Sanitaria Mollet Medical Director)는 조직 내 리더십 역량을 체계적으로 평가하고 개발하는 과정을 소개했다.
바르셀로나 인근 11개 지방자치단체, 약 17만5,000명의 주민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몰레트 보건재단은 약 1,500명의 의료 인력을 두고 있다. 기존에는 조직 구성원에게 공통 역량 모델을 적용해 왔지만, 관리자와 임상 리더에게 필요한 역량을 구체적으로 정의하고 개발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재단은 국제병원연맹(IHF)의 리더십 모델을 참고해 자체 평가 도구를 마련했다. 모델을 카탈루냐어로 번역하고 지역 의료 환경에 맞게 조정한 뒤, 리더십 역량을 1~5점 척도로 평가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평가 결과, 윤리적 의사결정과 환자 안전, 환자 중심 진료, 팀워크, 공감적 리더십, 경청 등이 상대적으로 강점으로 나타났다. 반면 재무 관리 지식과 지속가능성 실천에서는 개선할 부분이 확인됐다.
Allué 박사는 특히 지속가능성을 추진하는 실무자와 실제 조직 운영을 책임지는 관리자 사이에 인식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친환경 병원을 지향하더라도 지속가능성을 조직 전반의 운영 원칙으로 정착시키려면 관리자들의 이해와 참여가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재단은 평가 결과를 바탕으로 리더십 회복탄력성과 인력 관리·개발을 추가적인 핵심 역량으로 선정했다. 앞으로도 2년 주기로 평가를 진행하고, 결과를 개인별 교육과 역량 개발 계획에 반영할 예정이다.
Allué 박사가 강조한 것은 평가 점수 자체보다 평가 이후의 과정이었다. 관리자와 구성원이 결과를 놓고 대화하고, 그 대화를 실제 행동으로 이어가야 조직의 리더십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
콜롬비아, 검사실의 동선부터 다시 설계
콜롬비아 보고타 산타페 재단(Fundacion Santa Fe de Bogota)의 병리 및 진단검사의학과장 Javier Baena-Del Valle 박사는 진단검사실의 운영 방식을 재설계한 경험을 발표했다.
검사 수요가 빠르게 늘어나는 가운데 기존 인력과 공간, 장비를 활용하는 방식만으로는 업무 부담을 줄이기 어려웠다. 장비의 성능이 우수하더라도 검체 이동과 작업 단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으면 전체 처리 과정의 효율성을 높이는 데 한계가 있었다.
재단은 문제를 개별 장비의 교체가 아닌 전체 업무 흐름의 개선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했다. 임상과 운영, 재정, 공급망, IT, 인프라, 위험 관리 등 관련 부서가 초기 단계부터 참여하도록 했고, 여러 운영 시나리오를 비교하기 위해 컴퓨터 기반 시뮬레이션을 활용했다.
기존 모델에서는 검체가 여러 작업 단계를 거치며 이동하고, 직원들도 반복적인 업무와 불필요한 동선에 시간을 쓰고 있었다. 새로운 모델은 검체가 처리 과정으로 보다 직접적으로 이동하도록 설계하고, 직원들이 반복 업무에서 벗어나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시뮬레이션으로 두 운영 모델을 비교한 뒤 실제 현장에 적용한 결과, 특히 임상화학과 면역학 분야에서 검사 처리시간이 단축됐다. 직원들이 전문 지식과 판단력을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난 점도 주요 성과로 제시됐다.
Baena-Del Valle 박사는 이 과정에서 다학제적 협력과 사전 검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특히 IT 부서를 비롯한 관련 부서가 프로젝트 초기부터 참여해야 예상치 못한 문제를 줄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반복적인 업무를 줄이는 목적은 단순히 처리 속도를 높이는 데 있지 않다고 말했다. 확보된 시간을 직원들이 전문성을 발휘하고 임상적 가치를 높이는 데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운영 재설계의 핵심이라는 설명이다.
IHH 헬스케어, AI 도입 넘어 운영 모델 전환으로
IHH 헬스케어 싱가포르의 혁신 및 전환 부문 그룹 책임자 Elizabeth Han은 여러 국가와 의료기관에 걸친 대규모 조직 전환 전략을 공유했다.
IHH 헬스케어는 세계 10개국에서 89개 병원을 포함해 180개 이상의 의료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사업 규모가 커지면서 각 시장과 브랜드의 특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그룹 차원의 전략과 운영 역량을 어떻게 결합할지가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Han 책임자는 의료 혁신을 이야기할 때 AI와 디지털 기술에 관심이 집중되는 경향이 있지만, 기술 도입 자체가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중요한 것은 기술을 통해 환자 경험과 의료진의 업무, 조직의 의사결정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IHH 헬스케어는 이를 위해 ACE 프레임워크를 마련했다. 전략과 비전을 정렬하는 ‘Align’, 기존 업무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Challenge’, 구성원에게 실행 권한을 부여하는 ‘Empower’ 세 단계로 구성했다.
이 프레임워크를 바탕으로 임상적 우수성과 환자 경험, 새로운 진료 모델, 운영 효율성, 직원 및 의사 가치 제안, 기술·데이터·AI 등을 주요 전환 과제로 설정했다. 전문 진료 분야의 경쟁력을 높이고 가치 기반 의료를 확대하는 한편, 통합 정보시스템을 구축하고 업무 프로세스를 개선했다. 발표에서는 일부 프로세스의 처리시간이 최대 50% 단축됐다는 성과도 공개했다.
Han 책임자는 앞으로 AI 활용의 초점이 단순한 생산성 향상을 넘어 지능형 의료 시스템 구축으로 옮겨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서 작성과 반복 업무를 자동화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진료 경로를 조정하고, 의료진의 협업과 임상 의사결정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환자에게는 대기 시간 단축과 보다 매끄러운 진료 경험을, 의료진에게는 임상 의사결정 지원을, 직원에게는 반복 업무를 줄이고 보다 가치 있는 일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목표라고 강조한 그다.
전공의 교육에 시스템 관점을 더한 고려대학교의료원
고려대학교의료원 이영미 교수는 미래 의료 인력을 준비시키기 위해 전공의 교육에서 시스템 기반 실무(Systems-Based Practice, SBP)를 강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의료 시스템이 복잡해지면서 의사에게 요구되는 역량도 달라지고 있다. 개별 환자를 진료하는 능력뿐 아니라 환자 안전, 진료 조정, 지속적 질 향상, 보건의료체계에 대한 이해 등 조직과 시스템 전반을 고려하는 역량이 중요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 교수는 국내 전공의 교육에서 시스템 기반 실무가 아직 충분히 정립되지 않았으며, 임상 현장에서도 상대적으로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와 연구진은 통해 미국 ACGME(Accreditation Council for Graduate Medical Education, 미국 전공의·전임의 수련인증위원회)의 시스템 기반 실무 마일스톤을 국내 의료환경에 맞게 조정하고, 교수진과 전공의 패널을 대상으로 두 차례 델파이 조사를 실시해 필수 역량에 대한 합의를 도출했다.
연구에서는 환자 안전과 질 향상, 진료 조정 등 여러 영역에서 공통된 인식이 확인됐다. 반면 환자 안전 관련 정보의 공개와 보고, 질 향상 활동, 취약계층의 건강관리, 인구집단 건강 등에서는 교수진과 전공의 사이에 인식 차이가 나타났다.
특히 일부 전공의는 환자 안전 보고나 질 향상 활동을 자신의 역할이라기보다 간호사나 지도전문의 등 다른 구성원의 업무로 인식했다. 이는 시스템 기반 실무를 교육과정에 포함하는 것뿐 아니라, 의료진이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이해하도록 교육 환경을 바꿀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고 설명한 이 교수다.
이 교수는 지역사회 의료기관을 포함해 다양한 진료환경에 대한 전공의들의 경험을 넓히고, 피드백과 평가를 포함한 교육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교수 개발 역시 중요한 과제로 꼽았다. 교수진이 시스템 기반 실무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실제 교육에 반영할 수 있어야 전공의 교육도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다.
신규 병원 개원을 조직 변화의 계기로 만든 핀란드
핀란드 칸타헤메 복지서비스 지역 의료보건 및 물질 오남용 서비스 국장 Paula Turunen 박사는 신규 병원 Assi의 개원 과정에서 활용한 ‘Assi-Pass’ 변화 리더십 프레임워크를 소개했다.
핀란드 해멘린나에 들어선 Assi 병원은 올해 3월 개원했다. 약 17만2,000명의 주민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이 병원으로 기존 여러 병원의 조직과 인력이 이전하면서 업무 환경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오래된 병원에서 사용하던 개인 사무실 대신 공유 공간과 활동 기반 사무실을 도입해야 했고, 새로운 기술과 공간에 맞춰 업무 방식도 변경됐다. 정신과와 내과·외과 진료는 물론 전문의료와 일차의료가 같은 건물에서 협력해야 했기 때문에 부서 간 조정도 필수적이었다.
Turunen 박사는 약 70개 업무 단위의 준비 과정이 서로 연결돼 있어 각 부서가 개별적으로 계획을 세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공통된 일정과 명확한 책임, 부서 간 협력을 이끌어낼 수 있는 틀이 필요했다.
Assi-Pass는 병원 전체의 목표를 각 팀의 실행 계획으로 연결하기 위해 개발됐다. 모든 업무 단위가 공통된 10가지 질문을 활용해 변화의 목표와 책임자, 실행 방법, 직원 참여, 환자 요구, 의사소통, 지원 체계 등을 점검하도록 했다. 각 부서는 같은 틀을 사용하면서도 자신들의 업무 특성에 맞는 답을 찾았다.
활동 기반 사무실 전환 과정에서는 기존 시설에서 시범 운영을 진행해 직원들이 새로운 업무 환경을 미리 경험하도록 했다. 실제 사용 과정에서 나온 의견을 바탕으로 운영 방식을 조정했고, 직원들이 공동으로 의사결정에 참여해 사무실 이용 규칙을 마련했다.
Turunen 박사는 큰 변화에도 직무 만족도가 비교적 잘 유지됐다고 설명했다. 새로운 환경을 미리 경험하고 개선 과정에 참여할 기회를 제공한 것이 변화에 대한 적응을 돕는 요인이 됐다는 것이다.
그는 조직의 계획이 실제 업무 방식으로 이어지려면 각 팀이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누가 책임질 것인지부터 분명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변화를 일상적인 실천으로 연결하는 과정이야말로 Assi-Pass의 핵심이라는 설명이다.
공통된 과제는 변화의 현장 정착 가능성
이날 세션에서 소개된 사례들은 의료기관의 변화가 한 가지 방법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두바이는 교육 역량과 인력 공급 기반을 확충했고, 스페인은 리더십 평가를 통해 조직의 개발 과제를 찾았다. 콜롬비아는 시뮬레이션을 활용해 진단검사실의 업무 흐름을 바꿨으며, 싱가포르는 그룹 차원의 운영 전환과 AI 활용 전략을 제시했다. 한국은 전공의 교육에 시스템 관점을 더하는 방안을 모색했고, 핀란드는 신규 병원 개원을 계기로 여러 부서의 업무 방식을 조정했다.
각 사례가 강조한 방향은 달랐지만, 공통점은 분명하다. 변화는 계획이나 선언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인력을 준비시키고, 구성원들이 새로운 방식을 경험하게 하며, 실행 과정에서 나온 문제를 개선해야 한다.
의료기관에 요구되는 혁신의 범위는 갈수록 넓어지고 있다. 인력 부족과 진료의 복잡성, 비용 부담, 높아지는 환자 기대에 대응하려면 기술과 조직, 사람을 따로 떼어 생각하기 어렵다.
결국 의료 혁신의 성패는 무엇을 도입했느냐보다 그것을 통해 현장의 업무와 진료가 얼마나 달라졌느냐에 달려 있다. 지속 가능한 변화를 위해서는 조직의 전략을 구성원들이 실제 행동으로 연결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