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회 IHF(세계병원연맹) 총회 기간 중 열린 ‘대한민국 의료의 여정: 발전, 도전과제, 그리고 미래 혁신’ 세션에서는 압축적인 성장을 이뤄낸 한국 보건의료 시스템의 역사적 궤적을 되짚고, 초고령 사회 진입에 따른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미래 청사진이 심도 있게 다뤄졌다.
이날 세션은 한휘종 교수(연세대학교 보건대학원)가 좌장을 맡은 가운데 남효진 교수(을지대학교), 공인식 단장(보건복지부), 박정율 교수(고려대학교 안암병원) 등 국내 보건의료 분야 전문가들이 연단에 올라 한국 의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남효진 교수 “12년 만의 UHC 달성, 그 압축적 성장의 명암”
첫 발제자로 나선 을지대학교 남효진 교수는 한국이 전례 없는 빠른 속도로 보편적 건강보장(UHC, Universal Health Coverage)을 달성했다고 평가했다. 남 교수는 “한국은 1977년 500인 이상 직장 건강보험 도입을 시작으로 1988년 농어촌, 1989년 도시 자영업자로 보험을 확대하며 불과 12년 만에 전국민 건강보험을 실현했다”며 “이는 서구 선진국들이 반 세기에 걸쳐 이뤄낸 성과를 단기간에 달성한 전례 없는 기록”이라고 강조했다.
남 교수는 다만 이러한 압축적 성장은 국가 주도의 가입 의무화 정책과 엄격한 중앙통제식 행위별수가제, 민간자본 중심의 병상 확충을 통해 높고 우수한 의료접근성을 구축했지만 이처럼 빠른 속도의 발전은 오늘날 고위험·고난도 필수 의료의 불균형과 대형병원 쏠림 현상이라는 구조적 도전과제를 남겼다고 진단했다.
공인식 과장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지속 가능성… 지불제도 혁신 시급”
보건복지부 공인식 건강보험지불혁신추진단장은 한국 의료가 이제 양적 성장을 넘어 질적 지속가능성을 확보해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공 단장은 “한국은 ‘빨리빨리’ 문화로 상징되는 고속성장을 이뤘고, 의료접근성 면체서도 큰 성과를 거뒀다”며 “그러나 보건의료 개혁에 있어서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올바른 방향성과 지속 가능성”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이 전국민 건강보험을 구축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 의료비 중 공공보장률은 약 60% 수준에 머물러 있어 OECD 평균인 75%를 밑돌고 있으며, 지역 간 예방 가능 사망률 격차도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특히 2025~2026년을 기점으로 65세 이상 인구가 20%를 넘어서는 초고령 사회에 진입함에 따라 의료비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정부는 행위별수가 중심의 보상에서 벗어나 지역·필수의료 유지와 진료성과 중심의 보상을 강화하는 약 3조 4천억원 규모의 ‘공공정책수가’를 도입하는 등 지불제도 혁신을 강력히 추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박정율 교수 “AI 네이티브 병원과 지역완결형 케어로 미래 준비”
고대안암병원 박정율 교수는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과 급격한 고령화라는 삼중고 속에서 미래 병원 체계의 대전환을 주문했다.
그는 “한국은 고령화 속도뿐만 아니라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0.8명 안팎)과 인구 감소, 생산연령인구 감소라는 삼중고를 겪고 있는 가운데 의료비 지출은 지난 10년간 4배나 증가했고 특히 전체 보건의료 예산의 45% 이상이 고령층에 쓰이고 있다”며 위기감을 내비쳤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해법으로 AI가 운영의 뼈대가 되는 ‘AI 네이티브(AI 내재화) 병원’ 구축, 원격의료 제도화, 상급병원부터 지역사회 돌봄으로 이어지는 ‘커뮤니티 중심의 연속적 케어’를 제시했다.
AI 네이트브 병원은 단순한 도구 추가를 넘어 병원 운영 시스템 전반에 AI를 기본 구조로 결합하고 있으며, 원격의료의 경우 시범사업을 거쳐 제도화 및 디지털 헬스케어 도입을 가속화하는 한편 상급종합병원과 지역병원, 회복기/요양병원, 지역사회 돌봄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구축해 병원 입원기간을 줄이고 가정 및 지역사회에서의 삶을 지원하고 있다. 급격한 인구구조 변화 속에서 스마트 병원과 디지털 전환은 선택이 아닌 필수적인 생존 전략이라고 박정율 교수는 강조했다.
열띤 Q&A… “디지털 격차 해소와 공공·민간 상생이 관건”
발표 직후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에는 해외 참석자들의 날카로운 질문과 주제발표자의 심도 있는 답변이 오갔다.
저출산·고령화 대응 전략을 묻는 질문에 박정율 교수는 “단기적 재정 지원을 넘어 장기적인 관점에서 정부와 시민사회가 함께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답했다. 또 중환자실 AI(e-ICU) 도입 등 첨단 기술 적용과 관련해서는 “기술 자체보다 시스템 간 상호 운용성과 철저한 윤리적 가이드라인이 선행돼야 하며, AI는 의료진을 보조하는 하이브리드 형태로 접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민간 중심 의료 공급 구조에서의 공공성 확보 방안에 대해 공인식 단장은 “단일 건강보험 체계를 통해 수가를 관리하는 한편, 필수·공공의료를 수행하는 민간병원에는 공공정책수가 등 적절한 보상을 통해 공공성을 보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번 세션은 한국이 단기간에 이룩한 건강보험의 성공 신화를 넘어, 초고령화와 AI 대전환이라는 거대한 파고 속에서 공공과 민간의 협력, 그리고 지불제도 및 의료전달체계 개혁을 통해 진정한 ‘지속 가능한 헬스케어’로 나아가는 방향을 제시한 뜻깊은 자리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