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회 IHF(세계병원연맹) 총회 분과세션인 ‘의료 분야 AI 리더십 — 거버넌스, 신뢰, 시스템 전반의 통합’ 세션에서는 급변하는 의료 환경 속에서 인공지능(AI)과 디지털 기술이 단순한 보조 도구를 넘어 병원 운영과 임상 전반의 핵심 뼈대로 자리 잡기 위해 필요한 리더십과 거버넌스 전략이 심도 있게 다뤄졌다.
휴스턴 메쏘디스트 글로벌의 캐시 이스터(Cathy Easter) CEO가 좌장을 맡아 진행한 이번 세션에서는 한국, 미국, 인도의 대표적인 의료·IT 전문가들이 주제발표를 통해 실제 현장에서의 AI 도입 경험과 성공적인 시스템 통합 방안을 공유했다.
클라우드 네이티브 EMR에서 에이전틱·연결형 헬스케어 플랫폼으로의 의료 OS 진화
-이기혁(이지케어텍 부사장/분당서울대학교병원 가정의학과 과장)
첫 번째 발표를 맡은 이기혁 부사장은 병원정보시스템(HIS)의 역사적 진화 과정과 함께 인공지능 시대에 부응하는 차세대 의료 운영체제(Medical OS)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병원정보시스템(HIS)의 발전 단계: 의료 정보화는 초기 종이 차트를 대신한 전자의무기록(EMR) 도입을 시작으로 병원 전체의 업무 흐름을 디지털화하는 병원정보시스템(HIS) 단계로 진화했다. 이후 표준화된 워크플로우와 대규모 데이터를 여러 병원과 서비스에 공유할 수 있는 클라우드 기반 HIS 플랫폼으로 발전했으며, 현재는 AI 에이전트가 직접 임상 맥락을 이해하고 의사결정을 지원하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의료 OS(Medical OS)의 핵심 개념: 이 부사장은 의료 운영체제(Medical OS)가 단순히 개별 솔루션을 모아놓은 것이 아니라 의료진의 워크플로우, 환자 데이터, 그리고 AI 기술이 하나의 유기적인 흐름 속에서 함께 작동하는 통합 플랫폼이라고 강조했다. 클라우드 네이티브 기술과 마이크로서비스 아키텍처(MSA), 그리고 오픈소스 기술을 기반으로 다중 클라우드 환경을 지원하며 확장성을 높여가고 있다.
이지케어텍의 클라우드 헬스케어 플랫폼: 한국 최대의 의료 IT 솔루션 기업인 이지케어텍은 자체 개발한 클라우드 EMR을 통해 국내 대형병원뿐만 아니라 중소병원과 클리닉에 이르는 광범위한 생태계를 구축했다. 이미 42개 의료기관이 이 클라우드 플랫폼을 채택하고 있으며, 상급종합병원부터 소규모 의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규모와 니즈를 충족하는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AI와 의료진의 협업 구조: 미래의 의료 플랫폼은 모든 기능을 병원이 자체 개발할 필요 없이, 검증된 다양한 외부 IT 및 AI 파트너들의 솔루션을 레고 블록처럼 유연하게 연결하는 오픈 에코시스템을 지향해야 한다. 의사, 간호사, 약사 등 병원 내 모든 팀원들이 동일한 환자 데이터를 기반으로 모바일 EMR, 투약 관리 어플리케이션, 메신저 등을 통해 실시간으로 협업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환자 중심의 연속적 케어(Continuous Care): 이러한 의료 OS는 병원 내부에만 머무르지 않고 퇴원 후 환자가 가정에서 모바일 앱이나 원격 모니터링 솔루션을 통해 복약 지도와 건강 상태를 관리하고, 다음 방문 일정을 조율할 수 있도록 병원 외곽까지 연결된다. 파이어(FHIR) 등 국제 표준 의료정보 교환 프로토콜을 활용해 환자가 다른 병원으로 이동하더라도 임상 맥락과 기록이 끊김 없이 안전하게 연동되는 진정한 환자 중심의 연속 케어가 실현된다.
의료 시스템 내 AI 도입 및 거버넌스 리더십: 기술을 넘어선 신뢰와 책임
-루이스 로본 박사(매스 제너럴 브리검 인터내셔널 부사장/하버드의대 응급의학과 조교수)
두 번째 연자로 나선 루이스 로본 박사는 세계적인 의료기관인 매스 제너럴 브리검(Mass General Brigham)의 실제 운영 경험을 바탕으로, AI 도입 과정에서 리더십과 거버넌스가 왜 핵심적인 요소인지를 역설했다.
AI는 기술이 아니라 리더십의 문제: 로본 박사는 의료산업에서 AI의 필요성과 기술 자체는 이미 충분히 검증됐으며 널리 보급돼 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오늘날 진정한 과제는 새로운 기술을 무분별하게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어떻게 안전하고 투명하게 통제하며 조직 전체의 신뢰를 확보할 것인가 하는 ‘거버넌스와 리더십’에 달려 있다고 로본 박사는 강조했다.
응급의학과 의사로서의 현실적 고뇌: 전 세계 응급의료 현장의 의사들과 임상 팀원들은 급증하는 업무량과 과도한 행정적 부담으로 인해 극심한 번아웃(Burnout)에 시달리고 있다. 방대한 환자 데이터가 손끝에 존재하지만, 이를 정밀하게 검토하고 관리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AI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의료진의 부담을 덜어주고 환자와 마주하는 소중한 시간을 늘려주는 강력한 증폭제 역할을 할 수 있다.
MGB의 철저한 보안 및 프라이버시 원칙: 매스 제너럴 브리검에서는 임상 현장에서 AI 기반 음성 녹취 및 기록 생성 도구를 활용해 진료 노트를 작성할 때 매우 엄격한 보안 프로토콜을 적용한다. 의사가 내용을 검토하고 승인한 직후, 해당 진료 과정의 임상 녹음 원본 데이터는 추적 기록을 남기지 않고 즉각 완전히 파기된다. 이는 사전에 조직 차원에서 환자의 프라이버시와 사이버 보안을 최우선에 두겠다는 명확한 리더십의 결정에 따른 것이다.
임상 현장의 실질적 성과: 이러한 AI 툴의 도입은 놀라운 변화를 이끌어냈다. 내부 조사 결과, 의료진의 약 62%가 AI 도구 덕분에 자신의 경력을 연장하고 지속할 수 있게 됐다고 응답했으며, 특히 임상 의사들의 약 79%가 환자와 대화하고 진료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는 추가적인 시간을 확보했다고 평가했다.
체계적인 AI 수명주기 관리: 새로운 AI 솔루션은 단순히 도입하고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비전과의 일치 여부 검토, 맞춤형 커스터마이징, 실시간 모니터링, 그리고 상시적인 정합성 평가 등 엄격한 라이프사이클 거버넌스 관리 체계를 거친다. 알고리즘의 편향성을 방지하고 형평성을 보장하기 위해 전담 거버넌스 조직이 상시 가동된다.
거버넌스는 AI를 늦추는 장벽이 아니라, 신뢰를 통해 확산을 이끄는 토대
-이매뉴얼 루퍼트 박사(나라야나 헬스 대표이사 겸 그룹 CEO)
마지막 발표자인 인도의 이매뉴얼 루퍼트 박사는 거대 의료 네트워크를 운영하는 경영자의 시각에서 AI 거버넌스의 엄격한 구조와 인도 의료 현장의 대규모 AI 적용 사례를 생생하게 전달했다.
인도 헬스케어의 규모와 AI의 필수 불가결성: 인도의 나라야나 헬스는 인도 전역과 해외에 걸쳐 수십 개의 병원과 수천 개의 병상을 운영하며 연간 수백만 명의 환자를 돌보는 거대한 의료체계다. 특히 국민의 상당수가 막대한 의료 비용을 자부담해야 하는 환경 속에서, 6천만명이 넘는 당뇨환자 등 인구 대국이 직면한 질병 부담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AI와 디지털 자동화가 선택이 아닌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이다.
AI 도입의 명과 암 — 거버넌스의 부재가 낳는 위험: 만약 병원에 명확한 AI 거버넌스 체계가 없다면, 개별 임상가들이 임의로 검증되지 않은 일반 AI 어시스턴트를 사용해 오류가 발생하거나 환자 안전이 위협받을 수 있다. 파일럿 프로젝트가 실패했을 때 모든 책임을 기술 탓으로 돌리기 쉽지만, 진정한 원인은 기술의 결함이 아니라 이를 통제하고 관리할 거버넌스 체계의 부재에 있다.
나라야나 헬스의 거버넌스 기둥
전사적 AI 운영 위원회: 그룹 CEO가 직접 주재하고 매월 개최되는 위원회에서 모든 임상 및 비임상 AI 프로젝트와 파일럿, 스케일업 여부를 최종 승인한다.
명확한 책임자(Owner) 지정: 모든 AI 시스템에는 반드시 명확한 임상적 책임자(Owner)가 지정돼야 하며, 시스템의 기술적 정확성뿐만 아니라 최종적인 임상적 결과(Clinical Outcome)에 대해 책임을 진다.
전담 데이터 보호관(DPO) 제도: 환자의 생체 및 임상 데이터를 다루는 모든 시스템에 대해 독립적인 데이터 보호 책임자와 법률·계약 검토 부서의 사전 승인을 의무화했다.
단일 통합 등록부(Registry) 운영: 현재 도입됐거나 검토 중인 수십 개의 임상 및 비임상 AI 솔루션을 하나의 통합된 체계 안에서 등급별로 관리하며, 언제든 시스템을 중단할 수 있는 확실한 ‘킬 스위치(Kill Switch)’ 권한을 확보하고 있다.
대규모 임상 스크리닝 성공 사례: 나라야나 헬스는 당뇨병성 망막병증 환자를 조기에 발견하기 위해 AI 기반 스크리닝 툴을 도입해 60만명이 넘는 환자를 성공적으로 스크리닝했다. 이 과정에서 AI 모델 자체의 우수성(민감도 97%, 특이도 96%)도 중요했으나, 무엇보다 이를 판독하고 치료로 연계할 수 있는 전문 의료진의 역량 강화 교육과 체계적인 연동 프로세스가 성공의 핵심이었다.
루퍼트 박사는 “AI는 인간의 판단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전문성과 조율 능력을 극대화하는 증폭기여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